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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창작 소식!/만화영화

[만화영화 부분]한국 만화영화 제작자의 외침

사후 퇴직금은커녕 4대 보험 혜택마저 받을 수 없다. 엄연히 사회의 한 집단에 종속되어 있음에도 프리랜서라는 명목으로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 노동자 신분으로 구분되어 열악한 근무 환경을 견디어 내야한다. 이 땅의 모든 하청 애니메이터는 결코 ´철인´일 수 없다. 

가정이 있고 처자식을 책임져야 할 선배 애니메이터들 대다수는 박봉에 시달려야 했다.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직장을 잃은 동료도 있었다. 동료는 울먹였지만, 정작 심난해 하는 속사정은 실업자로 전락해서가 아니다. 

비정규직 직장의 특성인 ‘언제나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유가 단시일 내 다른 하청 애니메이션 회사로의 취업을 가능케 했다. 

동료의 문제는 당장 쾌쾌한 곰팡이 냄새로 가득한 반지하 단칸방의 방세를 내야 할 급여를 받을 수 없음이었다. 이는 불과 9년 전인 지난 1997년, 당시 나와 동료, 선배를 비롯한 하청 애니메이터들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하청 애니메이터들이 밀집해 있는 곳, 서울 관악구 봉천동, 신림동의 소위 달동네에 거주했던 그림쟁이의 말 못할 비애다. 

당시 나는 토끼굴 같은 반지하 단칸방에서 한국의 ´미야자키 하야오´를 꿈꾸었다. 그러나 현재는 손을 놓아 버린 대다수의 안타까운 선배들의 모습처럼 나 역시 한낱 몽상가로 전락했다. 좌절 사유는 역시 예나 지금이나 애니메이터의 실상이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음에 이골이 났다. 

학원을 거쳐 애니메이션 회사에 취업했던 난 선∙후배간 상하 수직적이고도 엄격한 관계의 만화가 문화생 시절과는 달리, 직속상관의 터치가 없었던 점이 마음에 들었다. 오로지 자신의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배들이 동화부서의 막내이자, 생 신인이었던 나에게 텃세를 행하지 않는 것은 ‘먹고사니즘’ 이라는 생존본능을 위한 투쟁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일을 함에 있어서 전력을 다해야 간신히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 예로, 지난 1997년 당시,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신)´의 시작점과 끝점을 나타내는 원화의 중간 동작인 ´동화´가 있다. 

동화 한 장의 단가는 800원이었다. 사실적인 그림을 뜻하는 사파체(8등신)의 경우, 800원 수준 안팎이었고, 간략하고도 과장된 스타일의 2등신 캐릭터 등의 그림인 만화체(2등신) 경우는 600원선이었다.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 즉, 물가도 올랐건만,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치 않는 하청 애니메이터의 수입 수준은 처참하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싶다.

‘많이 그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 부연설명을 하자면, 동화부의 한 애니메이터가 월 1000매 이상을 ´꾸준히´ 한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또 동화부 ´작감(팀장)´이 매달, 한 애니메이터에게 일을 몰아 줄 수도 없는 입장이다. 작감은 같은 부서의 동화 애니메이터들에게 일감의 난이도에 따른 일의 분배를 책임져야 한다.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동화맨이 한달 안에 1000매를 채우는 것도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다. 1000매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월 20일 이상을 야근에 시달려야 했다. 평균적으로 월 1300매 이상의 실적을 올리는 경력 5~6년차 이상의 선배들마저도 한달 내내 공휴일 없이 일에 매진했다. 

하청 애니메이터는 소속회사에서 일을 함에 있어서도 회사로부터 하루 3식을 지원받을 수없는 실정이다. 애니메이터들은 각자 식사를 해결해야 했고, 때문에 도시락을 챙겨오는 선배들도 많았다. 밤을 새는 날이면 야참으로 고작 컵라면이나, 500원짜리 빵으로 때우는 동료들이 대다수였다.

무엇보다 하청 애니메이터들이 고되어 하는 것은 일상이 철야의 연속일 것이다. 여가는커녕 휴식일정 조차 잡기 힘들다. 물론 철야 근무는 소속 회사의 빡빡한 일정을 맞추기 위함보다는 최소한의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자의 결정이라고는 하나, 과할 정도로 몸을 돌보지 않는, 혹사 수준의 선배들도 숱하게 보아 왔다. 

쏟아지는 졸음을 참다가 투명 유리판 아래, 형광등이 달려 있는 ´라이트 박스´에 머리를 찧어 유리를 깨뜨리기도 부지기수다. 나는 연일 코피가 멈추지 않아 괜한 걱정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애니메이터들은 직업병과도 같은 만성피로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청 애니메이터들은 일을 함에 있어서도 한 신, 한 신의 정성보다는 ´빠른 손놀림´이 관건이다. 생계유지를 위해서는 ´기능 요원´이 필수 조건인 것이다.

하청 애니메이터들의 또 하나의 취약점은 년 평균 2~3개월 이상의 비수기가 항시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시기, 애니메이터들은 소속 회사로부터 소득이 전혀 없다. 개인적으로 외주업체를 통해서 독자적으로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것도 동화경력이 있는, 검증된 애니메이터라야 가능하다.

해맑은 어린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해 준다는 ´타칭´ 프리랜서의 생계 수준은 이처럼 처절하며 처참하다. 그리고 현재 진행형이다.

만화로 전쟁의 충격을 이겨낸 일본

▲ 미야자키 하야오 ⓒ 지브리스튜디오 http://www.ghibli.jp

일본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브리 스튜디오´의 창시 구성원 중 한 명이자,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살아있는 신화로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있다.

하야오 감독은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1941년생인 그는 전시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한 군수공장의 공장장인 까닭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성인이 되었다.

오늘날,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명 연출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비결도 이 같은 어린 시절,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자신이 무척 좋아했던 영화와 책을 보며, 상상력의 파이를 넓혔던 점에 있을 것이다.

하야오 감독의 성공은 개인의 능력뿐만이 아니다. 일본정부의 ´애니메이션´을 창조해내는 ‘애니메이터’들에 대한 막강한 지원이 한몫했다.

▲ 이웃집 토토로 ⓒ 지브리스튜디오 http://www.ghibli.jp

지난 시절, 한국을 침략한 대가로 미국에게 원폭을 허용했던 일본. 그러나 일본 내 대다수 민중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그들은 현실보다는 이상에 눈을 돌렸다. 그 이상의 최종 목적지가 만화영화다.

고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을 비롯하여 마징가제트, 독수리 오형제 등 정의의 사도가 악의 무리를 타도하는 만화는 전후의 딜레마에 빠진 일본 국민들에게 기력을 북돋아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혜택(?)을 충분히 받은 전후 세대의 천재 애니메이터중의 한 명이 오시이 마모루이기도 하다. 공각 기동대, 기동 경찰 패트레이버, 인랑, 아발론 등의 만화 원작가이자 각본, 콘티, 연출 등 애니메이션계 다방면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마모루 감독은 이웃의 토토로로 대변되는 하야오 감독과 함께 현재 일본 내에서 외화 벌이의 선두주자가 분명하다.

이처럼 일본정부는 애니메이션 산업을 적극 육성한 댓가로 자국 일본인들에게는 삶의 용기를 심어 주었으며 국가적으로는 경제를 살렸다.

일본 애니메이션업계는 이를 바탕으로 만화를 대중화하기까지 과정도 체계적으로 시도했다.

독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은 원작 만화책을 중심으로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및 오리지널 비디오 애니메이션(이하 OVA)을 제작하는 것이다. 대중의 인지도가 높은 작품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재창조되기도 한다. 

치밀하고도 체계적인 절차를 걸친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흥행 보증 수표와도 같다. 원작을 접한 독자들이 TV 만화영화와 OVA를 통해 향수를 느끼고 다수의 대중을 형성,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하여 개봉관을 찾기 때문이다. 

▲ 공각기동대 ⓒ 오시이마모루

때문에 일본의 애니메이터들은 단순한 기능직 요원이 아니라, 전문직으로서, 창조 예술가로서, 청소년들의 동경 대상인 직업으로 자리매김 했다. 궁극적으로 경제 대국, 일본의 재정을 살찌우는 주체가 바로 애니메이터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애니메이션 현실

반면 비정규직 신분을 악용한 일부 중소 하청 만화 영화 업체의 횡포 따위나 창작 만화영화 업체는 국산 애니메이션이 흥행이 안 된다는 이유만으로 국내 개봉관들의 문전 박대의 현실은 아쉬움이 있다.

설사 국산 창작 애니메이션 업체가 개봉관을 획득하더라도 일반인들의 무관심 속에서 조기 종영의 파행을 맞기도 했다. 지난 2002년, 프랑스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장편 경쟁 부분 대상에 빛나는 <마리이야기>(이성강 감독/2001)를 비롯해 <엘리시움>(권재웅 감독/2002), <오세암>(성백엽 감독/2002),<원더풀 데이즈>(김문생 감독/2003) 등이 국내에서 흥행 참패로 고개를 떨어뜨린 대표적인 사례다. 타국에서는 작품성을 인정받았던, 수준 높은 창작 예술작품이 정작 고국에서는 무참히 외면 받고 있는 것이다. 이웃 나라와는 대비되는 한국 애니메이터들의 씁쓸한 현주소다. 

국내 언론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보도 현실도 아쉬움이 있다. 언론 일부는 아직도 국내에서 애니메이션을 ´황금 알을 나는 거위´쯤으로 표현한다. 구체적인 발전방향없이 추상적인 표현과 찬사만 늘어놓는다. 현실과 동떨어진, 터무니없는 왜곡된 정보 전달이다. 

국내의 전문대학교도 자칭 애니메이션을 육성책 일환으로 만화영화과를 설립하는 곳이 늘어만 간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낙후된 애니메이터인 들의 생활수준이 변치 않는다면, 대학에서 일류 애니메이터를 꿈꾸는 학생들 대부분은 차후, 나와 같은 한낱 꿈만 꾸고 마는 몽상가로 전락할 확률이 높다. 이들의 근성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최소한의 생계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형국임을 부인할 수 없음에 서글픈 마음마저 든다.

애니메이터는 비정규 노동자가 아닌 엄연한 꿈을 꾸는 정규직 노동자이다. 따라서 최소한의 기본급은 보장되어야 한다. 제2의 미야자키 하야오를 꿈꾸는 예비 애니메이터들이 헛된 몽상가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땅의 모든 하청애니메이터들은 제대로 된 환경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출처:데일리안